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리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본격 달리기 에세이다. 이 책을 세번 정도 봤다. 출간 됐을 때 한번, 팔이 부러지고 수술 했을 때 한번, 그리고 얼마전 갑자기 읽고 싶어서 한번. 이 책의 효용은 다름 아니라 달리고 싶게, 운동하고 싶게 만들어준다는 점에 있다. 뭔가 인생이 안풀릴떄 찾게 되는 에세이 집이다. 삶의 태도나 활기 같은 것들을 얻는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달리기를 말할 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가이자, 재즈 애호가이자, 러너 정도의 큰 정체성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생각한 점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프로필 사진이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면 느껴지는 점이 이 사람 고집 셀거 같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세계가 강한 느낌. 남의 참견을 싫어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러니까 등단 이후 수많은 소설과 잡문들을 꾸준히 써올수 있지 않았을까. 그 고집의 근간이 되는건 체력. 체력 단련에는 달리기가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이 우리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시사하는 점은 뭐였을까. 글쓰기는 술을 먹고 담배를 피며 가끔 창녀와 뒹굴며 세상을 향해 껄렁대는 그런 작가의 스테레오타입을 붕괴시킨 점이 아닐까 싶다. 습작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것이다. 한 번 쓰는건 쉬워도 꾸준하게 쓰는건 어렵다는 것. 일단 궁뎅이를 의자에 붙이고는 노트 혹은 컴퓨터 화면과의 사투를 장시간에 걸쳐 한다는건 쉽지가 않다. 반짝 떠오르는 영감 많으로는 원 히트 원더에 그칠 뿐. 수십년간 전세계 독자들에게 그것도 수많은 작품(인터넷 서점에서 무라카미하루키로 검색을 해보라)을 내 보인다는 건 축복 받은 작가일수도 있고 그만큼 건강한 체력이 뒷받침 되고 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운동선수와도 같은 그의 오래된 글쓰기에는 투지가 보인다. 러너와 소설가는 찰떡 궁합인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달린다는 행위는 생을 더 활기차게 보내고 생산성있게 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기분 좋게 해주는 행위다. 과연 달리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섹시한 단편 소설들. 오징어땅콩처럼 읽게 되는 에세이들. 매번 부숴진 남자를 등장 시키고 꼭 그의 주변에는 매혹적인 여성들이 등장하는 장편 소설들. 어찌됐든 무라카미 하루키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그런 에세이다. 달리기와 소설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매끈한 에세이.

책속으로

p.25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p.26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 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p.35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p.41 누군가로부터 까닭없이(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p.57 나는 가령, 무슨 일이든 뭔가를 시작하면 그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정을 못찾는 성격이다.

p.62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했다.

p.63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64 되풀이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원래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복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p.65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 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p.115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 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 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p.112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 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 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 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만큼의 보답은 있다.

p.126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p.127 아무튼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은 잘한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나 스스로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다음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올 소설이 어떤 것이 될지 기다리는 그것이 낙이기 때문이다.

p.127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p.148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나가려고 할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게재 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150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p.155 그것은 꽤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신이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고 하는 보람이 있다.

p.180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p.185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은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 간다. 다시 고쳐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써도 목적지에 도달할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럴때에는 그저 가설을 몇가지 제시할 수 밖에 없다. 혹은 의문 그 자체를 차례차례 부연해 갈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의문이 지닌 구조를 뭔가 다른것과 구조적으로 맞대어 비교하든지.

p.229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 스러운 -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p.256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p.264 내 경우,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 라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므로 레이스나 연습을 위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빼앗겨 버리고 나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할까, 약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로 현재로서는 비교적 온건한 단계에 나 자신을 머물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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